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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보관함/정리

[에픽하이] 문학... 영화... 그리고 음악까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 '힙합 詩人' 이선웅 씨

by T1ST0RY 2018. 5. 3.

문학... 영화... 그리고 음악까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 - '힙합 詩人' 이선웅 씨

2002.07.14 / 경인일보 / 유주선 기자 jsun@kyeongin.com






🔼 이선웅 씨가 수원 나혜석거리의 나혜석 동상을 찾았다. 100년 전 미술과 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선각자적 삶을 산 나혜석과 그에게 비슷한 부분이 읽혀진다.


미국의 명문대 스탠퍼드에서 학사와 석사를 3년 반만에, 그것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가 힙합을 하겠다고? 누구라도 궁금증을 가질 이야기다. 계속 공부하라는 교수들의 권유도, 같이 일해보자는 여러 제의도 떨쳐버리고 더욱이 자신의 교육을 위해 '맹모 삼천지교(孟母 三遷之敎)'까지 감행했던 부모의 실망마저 무릅썼다.


궁금증의 주인공 이선웅(22) 씨가 약속 장소인 수원 나혜석거리의 한 카페로 들어왔다. 힙합에 대한 공감대가 넓어 같이 작업을 하고 있다는 최진(19) 씨가 동행이었다. 취재진을 확인하자 허리를 거의 90도 각도로 꺾어 인사를 한 이 청년은 중키에 마른 체격으로 평범한 외모였다. 먼저 덥지 않느냐고 물었다. 모직 베레모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엉망이라서요. 뭐라도 써야겠는데 이것밖에 없었어요." 공부는 어떻게 했는지, 대학생활은 어땠는지, 부모의 교육방식은 무엇인지, 왜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궁금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먼저 '힙합'이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어렸을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고, 단편소설을 써왔습니다. 유색인에게 불리한 스탠퍼드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도 제가 써온 글이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랩에 매력을 느낀 것은 말과 글, 춤과 음악이 공존하고 있어서죠. 힙합이 시작된 뉴욕의 할렘은, 제가 한동안 거주한 적이 있는데 랭스턴 휴즈라는 유명한 흑인 시인이 살았던 곳이에요. 처음 힙합이 시작됐을 때 랩은 흑인들의 억눌린 감정을 읊은 '시(詩)'였어요. 저는 여전히 랩을 시라고 생각합니다. 라임(rhyme·운)도 잘 살아있고요. 미국에서도 랩이 현대에 죽어버린 '시 문화'를 부활시키고 있다는 평가가 크게 호응을 얻고 있지요." 힙합은 '거리문화'이고 '토론문화'이며 그 표현 수단인 랩은 사회 모순에 대한 고발이자 시적 승화일 뿐만 아니라 어떤 정치·사회적인 운동보다 자연스럽게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힙합은 대중과 함께하는 첨예한 문화운동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의 힙합은 "90년대 초반 인기였던 갱스터 랩이 들어온 뒤 굳어져버려 랩이 거칠고 욕설이 난무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이선웅 씨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사우디아라비아, 홍콩,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보다 7, 8살 위인 형과 누나 역시 미국 아이비리그 명문대 출신. 지금 용인에 살고 있는 부모는 자녀 뒷바라지를 위해 그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캐나다 이민을 강행했다. 모범생인 형과 누나에 비해 막내 아들은 공부는 제껴두고 늘 콘서트장과 영화관을 돌아다니자 그의 부모는 이번에는 막내의 교육을 위해 한국으로 되돌아왔다. 성남에 있는 서울외국어고등학교에 다니면서도 그는 여전히 음악과 영화, 문학에 심취해 2학년 때는 김건모의 노래 가사(5집 앨범에 'Rainy Christmas')를 쓰기도 하고 조안리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하면서 보냈다고 한다. "대학 가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었어요. 항상 '네가 잘 하는 것을 하라'고 말씀하시던 아버지가 그런 저를 보고 '대학이나 다녀보고 다른 것을 해보라'고 하시기에 영문학(English)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죠. 대학 시절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부모는 한국에 남고 혼자 건너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에 다녔는데 스스로도 "고생 많이 했다"고 말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했고 빨리 학업을 마치고 싶어 필수 이수과목을 전략적으로 수강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마음먹은 대로 공부가 진행돼 2년 반만에 필수학점을 이수했는데 평점은 4.0 만점에 4.0으로 수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점이 아니라 교수인 토비아스 울프(Tobias Woolf) 씨로부터 받은 창작문학상이다. 울프는 자전적 소설 '디스 보이스 라이프(This Boy's Life)'(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으로 영화화됨)로 우리나라에 잘 알려져 있는 유명 작가. 상장에 적힌 이 씨의 수상작은 'The Rat'(쥐)이었다. 내용을 물어보니 자신의 소설은 대부분 도시생활에서의 가족관계를 다룬 것이고, 영화적인 글이라고 소개했다. 미국이 좋았던 것은 소설가인 교수가 직접 가르치는데 학생의 재능을 키워주는 것을 가장 중시, 학년에 얽매이지 않고 재능에 따라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졸업 뒤 음악을 하려고 했으나 아버지가 반대해 카운슬러의 조언에 따라 바로 석사과정을 시작해 1년만인 올해 졸업을 했다. 남보다 학업을 빨리 마치고 나니 아버지가 더이상 말리지 못했다며 웃는다. 그의 학창시절은 마치 한 편의 전쟁 같았다. 접시닦이, 서빙 등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공부는 공부대로 빠듯하게 진행하고 음악 공부도 열심히 해나갔다. 인터넷을 통해 여러 힙합 뮤지션과 교분도 쌓았다.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뉴욕대에 가려고 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미국에서 활동하는 영화감독 진원석 씨를 만나 4개월간 조감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왜 그리 열심이었을까? "같이 영화를 좋아했던 고등학교 친구를 대학 때 잃었어요. 그때 참 많은 생각을 했는데... 세상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고, 무엇보다 '시간이 많지 않구나' 하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죠. 미국 생활은 여러 유혹이 널려 있고, 저도 때론 유혹을 받았어요. 그때마다 '오늘 술을 마시면 내일 할 일을 못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접곤 했지요. 술 마신 뒷날은 매사 천천히 하게 되잖아요?" 그가 본 한국 유학생의 모습은 문제였다. 부모 돈을 흥청망청 쓰면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시는 것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상당수가 '꿈이 없다'는 것이라고 한다. "왜 공부하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요. 부모가 시켜서 공부하고 잘 하니까 유학을 왔는데 꿈이 없어요. 사회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요." 그래서 외국인 유학생들과 어울리다 보니 중국어와 불어도 능통해졌다고 한다.


"음악은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지난 3월 귀국했지요. 미국에서 알게 된 힙합 프로듀서 최재유 형, 최진 씨, CB MASS와 같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힙합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수준을 끌어올리고 싶습니다. 대중문화의 수준이 높아져야 사회 전반적인 문화 수준도 높아지는 것 아닙니까." 눈을 빛내며 자신의 선택을 설명하는 그에게 인생은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질문을 해놓고 인생은 모험이나 도전이라는 답변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답은 의외였다. "아직 22년밖에 살지 않았는데... 낭만적인 생각은 없어요. 삶 자체가 결국에는 의미없는 것을 쫓아다니는 것 아닐까요? 기쁨을 주는 것도 많지만 최후의 답은 '믿음'인 것 같아요. 인생이 짧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열심히 하다 지칠 때는 늘 신앙이 힘이 되지요. 하는 일과 믿음이 합치되면 목표를 이루는 것이 보다 쉬워지고요. 신앙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여러 가지 다 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뷰를 마치자 이선웅이라는 이 '문화적 여행자'에게 기대를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존재가 이미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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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고전이네 에픽하이 데뷔하기도 전 인터뷰

2002년...

참 이걸보면서 느끼는건 대학생활동안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사람들이 미쳐서 선동되는걸 보면.. 

이젠 오래된 얘기인데도 계속 그때의 기억이 자리하네

처음 다른 연예인들 학력위조 논란이 될 때도 타블로는 별 일 없이 넘어갔는데 

갑자기 2009년 말부터 말도 안되는 글을 올리기 시작하더니 2010년에도 계속 올리면서 점점 동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더니 세력화되었다. 

그 과정을 지켜보니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이때가 내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더 깊게 좋아했던 가수가 갈라지는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던 시기와 겹쳐서 더욱 힘들었다. 

그 가수가 갈라져서 에픽하이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투컷은 군대가도 미쓰라랑 타블로만 활동하거나 타블로 솔로를 해도 되는데 

모든 것이 안됐으니까

그나마 마지막 연결수단이었던 트위터까지 닫아버리니 정말 눈물만 났다. 


한쪽은 말도 안되는 말에 선동 당하고 있는게 너무 환멸났고 한쪽은 너무나 믿기 힘든 말들이 전해져서 팩트인데 믿기 힘들어 혼란스러운데 거대 팬덤은 분열하고

처음 겪는 일인데 대형폭탄들이 두 개가 한꺼번에 왔으니 더욱 힘들었지

사실 난 지금까지도 그 두 사건 때문에 감정이 매말라버린것 같아

회의감을 제대로 느꼈던 시기

그 뒤로는 확실히 사람들을 믿는게 힘들어졌지 

저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달라지는 건 당연히 얘기하던 것을 너는 그거 믿어? 2명쪽이야 3명쪽이야? 계속 물어봐야 하고....

에휴 이건 설명하려면 하루도 모자라서 그냥 이쯤에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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